방송 해설, 인터뷰

현대 건축의 원점 '르. 꼴뷰제' ___ KBS 'TV미술관' ___ 1982. 4. 22.

그항 캬바농 2021. 5. 26. 16:21

  이 글은 1982년 4월 22일에 방영된 KBS 'TV미술관' 프로그램의 현대건축의 원점 '르. 꼴 뷰제'편에 김중업 선생이 직접 출연하여 스승인 르 코르뷔지에와의 개인적인 인연과 그의 작품세계를 직접 해설하신 내용을 옮긴 것이다. 

 

 이미 만년에 들어선 김중업 선생이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가는 5,60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작품다운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을 회상하면서 은연중 본인의 건축가적 의지를 다지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나 불과 6년 뒤인 1988년 5월, 김중업 선생이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심으로써 건축가로서 완숙기의 기량을 다 펼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나라 건축사에도 큰 손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아다. 

 

본문중에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5원칙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중 하나를 'Promenade architecturale'라고 하고 '건축학적인 유희'라고 설명한 부분은 '수평창의 원칙'이라고 알려진 것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KBS TV미술관 시간입니다.   오늘 저녁은 현대건축의 원점이라는 타이틀로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과 본인과의 만남은 꼭 만 25년전의 일이었었습니다. 1952년 7월이었고 장소는 베니스였습니다.  방금? 유네스코의 주최로 이태리 베니스에서 제1회 세계 예술가 회의가 열려 본인이 그곳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은 그곳의 의장으로서 같이 참석해 주셨고 베니스에서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저의 일생의 진로가 결정됐다고 해도 다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방금 서울공대 조교수로서 제자들에게 그분의 다양 다채로운 이론을 펼쳐 보이고 있는 시절이었고 그럼으로써 제가 만나 뵙고 싶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를 베니스에서 만났다는 사건은 저의 일생의 큰 전기를 마련했다고 해도 다름이 아닙니다.  그분을 따라서 파리 세 불가 35번지에서 만 4년간 그와 협동을 하게 됩니다.  그 협동하는 동안 많은 고초를 겪었고 또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만은 특이할만한 일은 이 필름에 여러모로 펼쳐지고 있는 샹디갈의 도시계획이었었습니다.  

 


특히,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은 자신에게 무척 준엄한 분이어서 그 분이 생각하고 계신 철저한 건축이론을 구김살 없이 펼쳐나가는 분이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과 같이 협동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었습니다만은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그분의 생애와 작품세계는 다양하고 또한 풍부합니다.  그와 동시에 조형미에 있어서는 특출하여 현대가 낳은 거장의 한 사람으로서 특이할만한 분입니다.  특히, 그때의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은 모든 세계의 건축가들에게 한 개의 아버지의 구실을 했고,  1927년에 결성된 C.I.A.M회의를 이끌고 그분이 아카데미즘에 정면 대결했을 때 전 세계의 건축가들은 또한 거기에 가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현대건축의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KBS에서 이러한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의 프로를 장만하여 저한테 해설을 부탁하게 됨으로써 다시금 그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과의 여러 일들이 주마등같이 눈앞에 펼쳐지며 또한 이 분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본인이 직접 해설하게 됨으로써 감개무량합니다.  


우리나라의 건축계도 또한 이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좋은 작품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이 가신길을 우리는 되새기며 좋은 작업을 하여야 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과 같이 이 필름을 따라 저의 해설로서 그분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분의 다채로운 또한 주옥같은 작품세계를 감상하십시다.

 


L'architecture est le jeu savant, correct et magnifique dew formes sous la lumiere. - Le Corbusier
건축이란 형태가 지적이고 정확하게 집합되어 빛과 함께 훌륭한 상호작용을 이룬다 - 르 코르뷔지에


르 코르뷔지에는 20세기 건축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킨 위대한 건축가인 동시에 화가이며 또한 조각가로서 인류역사상 뛰어난 조형예술가이었습니다.  더욱이 르 코르뷔지에는 사회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가 제시한 도시계획은 시대를 앞질러 미래를 예시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동시에 시인이어서 주옥같은 시심을 담은 가지가지의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그는 확실히 현대가 잃어버린 르네상스적인 전인격자여서 살아있을 때 그가 남긴 전위적인 발언과 작품들이 오늘도 새로운 향기를 물씬 풍기며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거대하게 회상됩니다.

 


 이제 르 코르뷔지에는 세상에 없습니다.  1965년 여름 지중해에서 익사할때까지 그는 하루도 작업을 중단한 적이 없이 자신을 불사르고 떠났습니다.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이 세상에는 연민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르 코르뷔지에의 아뜨리에

여기는 그의 평생 작품을 모아놓은 르 코르뷔지에의 아뜨리에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평생 타협을 싫어한 관계로 2차대전동안 많은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거의 60이 되어서야 젊어서부터 생각하던 주요 개념들을 실현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항상 건축가란 50부터 60이 되어야  비로소 작품 다 운 것을 떳떳이 받칠 수 있어하시던 그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선합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성향과 믿음은 그가 쓴 책과 잡지 어느 곳에서 나 볼 수 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주의주장을 엄격히 지켜 사소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1965년 80이 다 된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가로서 세상에 등장하던 1910년대 풍조는 바로크, 로코코에 뒤이는 세기말적인 장식 과다의  광적인 현상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데카당스 속에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1914년, 1차대전이 터지던  해,  그는 도미노 시스템이라는 혁명적인 건축이론을 발표합니다.  벽체에서 해방되어 기둥만으로 지지된 콘크리트판이 모든 장식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여 구조만이 순수히 표출됨으로써 평면과 입면이 해방됩니다.  현대건축의 첫 빛이 이로써 강렬히 출현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깊고 달콤한 아카데미즘의 삶 속에 쾌적히 뭉쳐있던 뭍 건축가들에게는 찬물을 끼얹는 놀랍고도 위험한 이론이라  온통 세상은 벌집을 쑤신 듯 비난의 화살을 르 코르뷔지에에게 집중시켰습니다.  이날부터 그는 아카데미와  정면으로 대결하여 50년이라는 그의  긴 생애를 싸움으로 불사조와도 같이 강인하게 밀어붙인 현대건축의 새로운 전통을 우리들에게 푸짐히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터에서 허덕이던 모습은 처절했고 여기 여러분들이 보시는 작품들은 그의 구상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1000점이 넘는 작품 중에 불과 몇 프로의 구상이 햇빛을 보았을 뿐이며 수십 권의 저서는 그의  피맺힌 투쟁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1887년 스위스의 작은 마을인 라쇼드퐁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 국경에 가까운 시계수공업자의 프랑스계 집안입니다.  1887년에는 그는 샤를 에드 왈 쟝느레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에펠탑이 지어지던 해이 었습니다.  그의 초기 그림에는 쟝느레라고 사인했죠.  르 코르뷔지에는 애초에는 시계판을 장식하는 일을 배우기 위해서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 진학합니다.  그곳에서 뛰어난 미술교수인 라프 라트니에를 만나게 되고 이분을 통해서 세계 곳곳의 세워진 위대한 건축 작품들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장식예술에 흥미를 잃고 건축가로서 출발하려는 불타는 의욕을 가슴 깊이 간직하여 근동 지방에의 무전여행을 떠납니다.  배낭에는 스케치북 몇 권이 담겨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태리를 거쳐 그리스와 터키를 헤맵니다.  이태리의 제정 로마제국의 유적들을 살핀 그는 서구 문명의 근원지인 그리스에서 큰 감동을 받고 터키에서 비로소 내부공간의 극적인 상봉을 체험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터키의 회교사원을 보고 처음으로 내부공간의 형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짜릿한 내부의 체험이 훗날 그의 최대걸작인 롱샹예배당으로 승화합니다.  그의 눈은 예리하고 정확했습니다.   집이란 사람이 살기위한 기계다 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기능주의를 낳았지만 그는 평생 기능만을 내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새로운 혼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는 그의 작품에 포에지?를 흠뻑 담았습니다.  오로지 재간없는 건축가들이 그가 아카데미즘에 정면 도전할 때 말한 집이란 살기위한 기계라는 낱말을 내세워 무미건조한 상자들을 여기저기 세우게 되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빌딩을 지을때도 몇개의 표준요소를 서로 다른 타입으로 결합 조화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뼈대가 튼튼해야 합니다.  뼈대가 튼튼하면 내부벽은 버팀대역할을 하지 않아도 됨으로 마음대로 위치를 정할 수 있습니다.  문이나 창문, 장, 갖가지 부분품들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건축법의 시초입니다.


고전적인 미의 원칙을 없앤다는 일을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가능해졌으므로 새로운 조형언어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Pilotis : 독립주. 기둥위의 빌딩.  (필로티)

 

 

 

Façade libre : 자유스러운 입면.  파리대학도시의 스위스 학생기숙사입니다. 

 

 

Promenade architecturate : 건축학적인 유희.  1929년부터 1931년에 파리에 지어진 구세군 본부 건물입니다.   

 

 

Plan libre : 자유스러운 평면. 설계가 자유롭습니다.  1957년부터 1959년사이에 파리대학도시에 세워진 브라질 학생

                기숙사입니다.  채광장치입니다. 

 

 

Toit - terrasse : 옥상 정원. 옥상 테라스입니다.  여기는 1947년부터 1952년에 지어진 마르세유 아파트 단지입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퓨어리즘 이론을 잘 나타내어주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양식은 1929년 파리교외 브와시에 지어진 사보아 별장에 나타납니다.  오늘날 사보아 별장의 프랑스의 기념 건축물로 손꼽힙니다.  

한편 지구의 반대편 인디아에서 말년에 가까운 나이인 1954년 르 코르뷔지에는 아메다바드의 제분업자 회관 빌딩을 지었습니다.  이 빌딩은 르 코르뷔지에의 채양이론을 이용했으며 1956년 완공된 것입니다.  뷔 솔레이유라고 불리우는 채광장치 방법의 하나인 것입니다.   

 

- 인도 아메다바드 빌라 쇼단

아메다바드의 쇼단주택은 파라솔 지붕아래 연결식 건축이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채양을 다양하게 사용한 건축물입니다.  내부는 외부로,  외부공간은 내부공간으로 부담없이 이어져가는 율동적인 리듬은 인간들에게 한없이 부푼 꿈을 듬뿍 안겨 줍니다.  높이 뚫린 곳이 있는가 하면 얕게 막힌 공간이 뒤따르고, 기둥을 얼싸안고 흐느낄수도, 꽥! 큰소리로 외칠 수도 있는 또하나의 멋이 흐르는 자연이 여기 있습니다.  오로지 평온만이 여러분을 감싸줍니다.  시심이 흠뻑담긴 아늑한 환경이 여러분께 부드럽게 손짓합니다.  과연 인간이 살고 싶어하는 환경입니다.  삶에의 드높은 찬가가 들려올 법도 합니다.  집이란 인간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안식처이어야 하며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심신이 흠뻑 쉬어질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패각의 고동소리가 은은히 울려오는, 삶에의 희열이 느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 사라바이 저택

개방구성의 두번째 예입니다.  역시 1956년에 완공된 아메다바드의 사라바이 저택입니다.  

 

 

 

- 하이디웨버 박물관

쥬리히 공원에 있는 하이디 웨버 박물관입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회관이라고도 불리워집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마지막 작품으로 다양한 색을 쓰고 있습니다.

 

 

 

Le sociologue

 

르 코르뷔지에는 사회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거와 작업, 용도와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가능성 간의 상호관계가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도시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개개인이 자유를 즐겨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사람이 공간과 햋빛과 탁트인 풀밭을 가질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Modulor 비례척도

1942년, 르 코르뷔지에는 인간비율에 의한 척도, 즉 모듀로를 개발했습니다.  측량가이기도 한 르 코르뷔지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원시인들은 자신의 얼굴이나 팔길이나 엄지손가락으로 길이를 재었다고 말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물을 6척의 사람을 대상으로 측정하기로 했습니다.  

1947년, 60세가 되었을 때 르코르뷔지에는 처음으로 큰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르세유의 아파트 단지를 짓는 계획입니다.  각 아파트마다 두 단계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동서 양쪽으로 창이 나있어 구석구석에 빛이 들어옵니다.  발코니는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름에는 그늘이 겨울에는 햍볓이 듭니다.  그러나 2차대전 후 이 건물이 완성되고 나서 르 코르뷔지에는 전망을 해쳤다는 원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는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계속 공격을 받으면서도 5년동안이나 공동주택 계획을 추진시켰습니다.  

 

-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é d'Habitation

마르세유 단지는 방사도시를 형성하는 그룹 중 하나였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전쟁에 파괴된 이 도시를 재건하려고 애쓰고 있을때 프랑스 동부의 생디에에서는 관청지구 주위에 8개의 그와같은 단지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사촌 피에르 쟌느레와 함께 몇년동안 도시공간의 ??만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파리의 루 드 세브르에 아트리에를 꾸몄습니다.  루 드 세브르의 아트리에에 모인 동료들 중에는 써트, 사카쿨라, 로잔스키,  더쉬, 세나키스가 있었습니다.

 

 

- 라 투르레트 수도원 Monastery of Sainte Marie de la Tourette

르 코르뷔지에는 건물의 꼭대기에 경사를 만들었습니다.  왼쪽에는 창문이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른쪽 수도사가 사는 곳에는 경사진 유리창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이 수도원은 매우 간소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가 풍깁니다.  

 

 

 

L'urbaniste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계획가이기도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뒤늦게야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도시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계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40년동안 르 코르뷔지에는 이상적인 도시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1925년 그는 파리 중심지를 재건설하기위한  보아장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설계는 빛나는 도시라고 불리워집니다.  그는 고층건물도 연구하여서 십자형, 부채꼴형, 코르테즈식등 다양한 평면들을 남겼습니다.  1945년 르 코르뷔지에는 파리의 4개에 고층건물을 세우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리시민들을 파리를 파괴하는 처사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리오항구에는 고속도로를 뒤로 하고 있는 아파트단지가 하나 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위해서 리오 호반에 상업단지를 세우는 설계를 하였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알제의 도시설계를 12년동안 고치고 또 고쳤지만 그의 설계는 뉴욕이나 안트워프나 베를린에서나 마찬가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의 여러 기능을 분리시켰습니다.  1933년 아테네 도시계획 헌장의 세부적인 구분에 따르면 그는 주거, 작업, 심신의 피로회복, 교통순환으로 나누었습니다.  도시계획은 인간활동에 따라 분류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을 기준으로 할까요?  르 코르뷔지에는 인간은 하나라고 믿었습니다.  도시인구가 3만이든 100만이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은 같은 것 입니다.

 

인도는 그에게 큰 기회를 주었습니다.  유럽이 거부했던 기회를 동양이 베풀어준 것입니다.  르 코르뷔지에 자신도 한쪽은 원시시대, 한쪽은 현대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바로 그 자신이 이제 막 독립한 국가에서 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는 경제적으로 빈곤했으므로 도시에서도 가난한 노동자들이 뜨거운 햇볕아래서 맨손으로 건설해야 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한때 인도는 펀잡주를 수도로 해야 했습니다.  펀잡의 행정지구는 길이가 1마일이나 되는 세개의 커다란 빌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기슭에 위치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샹디갈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샹디갈의 거리는 길게 뻗어 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쉴소?(발음이 불명확함)가 있는 곳에 조화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곡선보다는 직각이 좋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도시도 바둑판과 같이 설계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일곱개의 주요도로가 있습니다.  1,2,3번 도로는 많은 교통량을 감당하는 역할을 하고 4번도로는 시장으로 통합니다.  5번과 6번은 교외와 도심지를 연결해 줍니다.  7번은 공원으로 갑니다.  이런 새로운 도시설계로 이 도시는 아직 교통문제를 모릅니다.  샹디갈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요?  대부분이 건설노동자이거나 공무원입니다.  아침마다 1만명의 노동자들이 집에서 조금 떨어진 사무실로 몰려갑니다.  그 중 4천명정도가 사무직일을 합니다.  광장 반대편에는 대부분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을 짓기 30년전 르 코르뷔지에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건축학은 실리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돌과 나무와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집이나 큰 저택을 지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건축이다.  그러나 갑자기 집 모습이 내 마음을 두드리고 나에게 호의를 갖게하며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줄 때 나는 아름답다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건축술이다.  예술로 승화하는 것이다.

 

건축은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인간이 창조해낼 수 있는 또하나의 엄청난 연극입니다.  산문시가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대하소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삶에 멋있고 힘찬 리듬을 주어 어려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도 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러한 귀한 작업을 과감히 제시한 위대한 건축가이기에 두고두고 마음속에 음미해지는 인간입니다.  

 

대법원을 마주보고 있는 건축은 국회의사당입니다.  파리도 모스크바도 뉴욕도 르 코르뷔지에에게 이와같이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50여년의 기나긴 투쟁 속에서도 르 코르뷔지에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이점에 있어서는 내가 옳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 생각은 분명히 옳다고 자신했습니다.  

 

 

방금 여러분들과 같이 화면을 통해서 본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의 일생은 파란만장 했습니다.  (본인도 ㅠㅠ) 그의 작품도 또한 아주 드라마틱한 작품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르 코르뷔지에에 관한 얘기가 심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르코르뷔지에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여러분들이 화면을 통해서 보시다시피 그분은 키가 작았습니다.  거기에 굵은 검은 안경테를 쓰고 코끼리와 같은 작은 눈이 반짝이면서 사물을 철저히 사색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평상시에는 과묵했습니다만은 일단 논쟁을 벌일때에는 그분은 쉴사이없이 속사포같이 쏴 붙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일생은 일단 투쟁의 일생이었었고 돌아가시고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분이 쌓아올린 여러가지 업적이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줍니다.  그런데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만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라는 예술가는 모두 고독한 사람들이었었습니다.  단지 그 고독함을 이겨내서 자기에게 이긴 사람만이 좋은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분네들이 고독했지만은 뒤따라가는 이들이 많기에 그분네들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네들의 위대한 업적은 길이길이 살아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김중업 선생 본인께도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70에 가까운 르코르뷔지에 선생님을 모시는 동안 그분이 얼마나 빛을, 피맺히게 작업에 몰두하는 가에 젋은 우리들이 무척 따라가기 힘겨웠습니다.  그 정도로 정신연령은 젊었습니다.  그 젊은 정신연령이 있었기에 그분은 위대한 작업을 했다고 봅니다.  수백년에 한사람 나올까 말까한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도시란 무엇이며 도시에 사는 인간이란 어떠한 것이고 또한 그속에 우리가 어떻게 사는 공간을 꾸며나가야 되는가에 대해서 많은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  오늘날 없지만 내일은 위하여서 열은 창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우리들이 두고두고 그분의 가르침을 뒤따라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1982년 4월 22일 KBS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