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잡지 기고문

파리통신 (巴里通信) - 1953년 4월

그항 캬바농 2021. 6. 3. 16:28

  이 글은 서울신문사에서 발간한 신천지[제8권 제1호 (1953년 4월 속간호) pp.233-240]에 게재된 글로 김중업선생이 파리에서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일할 당시에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에게 보낸 편지이다.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 그의 아틀리에에 합류할 당시의 심경이 생생이 담겨있어 흥미롭다.  전쟁 중인 불우한 고국에 대한 걱정과 거기에 남겨진 가족에 대한 사랑도 절절히 느껴진다. 

 

  전반적인 내용은 김환기화백의 미술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김중업선생이 김화백에게 파리로 와서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작품세계를 넓히길 강하게 권하고 있다.  실제로 이후 김환기화백은 1956년부터 59년까지 3년간 이른바 파리시대를 갖는다.  개인의 서간문이 잡지에 실린 것을 보면 김중업 선생이 파리 체류 중에도 국내에서 인지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잡지에 공개한 것은 김환기 화백측에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추측하기는, 김화백의 매니저역할을 하신 부인 김향안여사가 남편에게 더 큰 기회를 갖게하길 위해서 한 기획이지 않나 싶다.

 

맞춤법, 띄어쓰기는 원문을 옮겼기 때문에 현대문법과는 상이한 면이 많다.

 


 

끝없시 존경하옵고 그리운 수화 형님에게 

 

  이세상에 무삼죄를 그다지도 많이 지니고 나왔었기에 행복스러워 보이는 사람들만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파리의 집웅밑에서 항시 그리운 형님에게까지 죄만진채 소식하나 전하지 못아였아옴이 쓸쓸하올 따름이옵니다.  한국을 떠나온지 어느듯 다섯달이 지나가고 무덥든 여름철이 지나 누렇게 물든 마로니에의 입사귀들이 소리도 없이 우수수 떨어지고 나드니만, 어둠컴컴한 하늘엔 항시 바람이 일고 구진비가 나리고 눈보다 서리치는 고적한 겨울이 깊어 회색의 높은 벽들이 나를 위하(威嚇: 힘으로 으르고 협박함)하고, 창밖으로 정다운 사람들끼리 테이블을 마조하여 커-피를 나느는 모습이 한없이 그슬품만을 자아낼~.  비~ㄴ 가슴속엔 어두움만이 고이는양 여수에 가득한 툰동자 속에 피~ㅇ 도는 뜨거운 눈물을 엇절줄을 몰랏서요.  팔자에도 토~ㅇ 있을상 싶지 안튼 구라파엘랑 억지로 떠나 온다고 몹시도 바쁘고 애달프든 지난날이 주마등의 그림자마냥 나의 눈 앞이 악지도 설레입니다.  잠간 단여 간다든것이 수십만리 떨어진 낫선 하눌 밑에서 이방인들틈에 끼여 보헤미양 마냥 움틀거리며 금을금니다.  사랑스러운이 들과 떨어져 있다는것이 한없시 그리운 추억속으로 무엇인지 모르게 발버둥질치며 떨어지는 사나이 꿈자리와도 같이 허뚱하고 무겁습니다.  허뚱한 가슴속엔 찬바람만이 스며 들고 채워질리없는 가슴 깊은곳에 고히고 고히고나면......  가슴을뚤코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어두움이여, 영영 햇빛에 쪼일기회조차 있을상싶지 안는 망핫탄의 뒷골목 '덷드, 엔드' 와도 같이 움푹 파인 상처, 페니슈링,  스트렙트 마이싱 별별약을 다~ 써봤든들 곤처질리 없는 무거운 상처 항시 찌프린 나의가슴에는 고국의 흙냄새가, 마음터놓고 이야기 할수있는 좋은 벗들이, 그리고 생을 서로 기탁한 가족들이 이렇게도 그리우리라고는 미처 생각치도 못했었지요. 

  사라나간다는것이 몹시도 힘든 시절에 태어나서 무삼 얄구진 욕망이기에 아름다움과 더부러 살겠노라고 땅한털미도(?) 발부칠곳없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진채 헤매여야 했든가요.  눈알이 툭 뛰여나와 간이 밧짝 말러부튼 사람마냥 허둥지둥헤매여야만한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서울거리란, 대구거리란, 부산거리란 거리마다 애닯은 가슴을 부둥켜 안고 비틀거리며 어떻게해서라도 떠나야만한다고 불우짖어 왔었지요.  그렇지요 어떻게해서라도 떠나야만 했어요.  돈과 권력만이 사람을 아는곳에서 그래도 생을 유지할수있었냐는것이 기적이라면 돈한푼없고 누구에게 아양떨줄 몰으고 남들이 가장 필요한기술이라는 이중으로도 삼중으로도 변하여야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리고 미련하고 Uaive (Naive의 오기로 보임)한 인간이 그래도 떠나와서 Le Corbusier의 손이 되였다는 것은 더할나위없는 기적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렇게도 뒷걸음질만을 할수있었냐는것, 무엇을지니고 낳어줄 또한 무엇이 있었기에 대학의 강단위에서 쓰라린 가슴을 쓰러 모우는수 밖에 딴도리가 있을수없는 *Andre Gjds (Andre Gide의  오기)의 쇠사슬을 풀리운 프로메테 와도 같은 우숙광스럽고 애통한 **칼카추워와도 같은 생활이 너무나도 길었었어요.  너무나도 겨울이 길었었기에 지나치게 처량행기에 미칠듯이 기다려지는 봄.  

 


*앙드레 지드의 '잘못 묶인 프로메테우스'(1899)에서 인용함.

** 알수없음


 

파릿파릿 움돋아 나오는 풀이며 어쩌다 개이는 수도 있다는듯 확 쏘다져 흘으는 햇빛. 일개인이 자기 삶위에 한 혁명을 일으킨다는것은 그리힘든 일인것 같지는 안소이다만 가족들에게 까지 이를 강요한다는 일은 지극히도 힘든일인가 보오.  내자신 이곳에 남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도 안했썼서요.  오로지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워질수있는 길을 터놓코서 다시 돌아가 어떻게 떠나올 기회를 만들어 다시 오도록 생각했섰지요.  내자신 토~ㅇ 믿지 않었섰기에 가족에게도 이곳에 남으리라는 예고좋차 한마디 남길리 없섰서요.  더욱이 산월에 떠나오는 몸이 그렇치 않어도 조히(早) 돌아가여야 하겠다고만 느꼈섰지요.  기이스러운 마을 Venice에서 Le Corbusier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것이 마술에 홀리우듯 그의 Atelier의 손이 되어 되고 그의 만년의 걸작창조의 길을 더듬게 되고야 말었섰서요.  Le Corbusier가 같이 남도록 이야기 할때에도 미칠듯이 기뿌고날뛰는 가슴속에 그래도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무엇이라 형언할수없는 무거운것이 복바쳐 올라와 어떻게 할바를몰랐섰서요.  형님.  가족을 거나리고 있을때에도 사라나간다는 것만도 지나치게 힘든 시절에 태워나서 나조차 없는 한국에서 가족들이 어떻게 살어 나가리라고 믿을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해서라도 새로워저야하고 알뜰하고 어여뿐 고국위에 아름다운 꽃으로 수놓아야하리라는 이를테면 일생에 단한개라도 좋으니 아름답고 쓸모있고 삶을 즐길수있는 작품을 만들고야 마리라는 뜨거운 꿈을 지니고 밤이나 낮이나 애닲게 기다려지는 의문이 나의 앞에 열리는(인쇄상태 불량)것같은 놀라움이섞인 두군거리는 가슴속에 돌아옴을 손꼽아들 기다리는 헐벗고 떨고있을 가족들의 막막한 그슬픈 얼굴이 「크러스엎」되면 어떻게했으면 좋을런지 통~ㅇ 것잡을수가 없었어요. 

 

나를지도해줄수있는 유일한 스승, 건축가이며 도시계획가이며 화가이며 조각가이며 시인인동시에 평론가인 Le Corbusier 와더부러 인도 펀잡 정부의 새로운 수도 Chandigarh의 멋드러진 건설을 구상하는 오늘날에도 나만이 홀로 이곳에 남어 충실한 시간을 보낼수있다는것이 매말러버린 고국에서 헤매이는 가족들이나 발전할수있는 뛰여난 재간을 갖이고서도 썩고만있는 좋은 벗들을 생각하오면 가슴이 맥켜 미안하다느니 보다 죄만 거듭하고있는 것만 같읍니다.  내가슴이 너무나도 허뚱하고 또한 늘상 채워질리없는 날들이 있어 부티 낮이나 밤이나 일요일까지도 Atelier의 제도판 위에 그적거리는 것만이 온통 나의 생활의 전부이라는 삶이 일우워지고 지난날 좋고 그로건간에 떠오르는 Idea 조차 말러부터 쏟아저나오지 않음이 가슴찢어질 것만 같이 서러웠어요.  무엇을 알고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할수있는가가 문제이고 모~든것을 잊어버리고 적음을 재발견할때 지날날「웨」(인쇄상태불량) 「무엇이」이 두가지의 물음을 잃은 생활이 너무나도 길었었다고 느껴지며 녹이 쓴 나의 지성과 묻어진 나의 감성이 새로워질려고 애쓰면 애쓸사록 마음대로 딸어오지 않음이 지나치게 민망스럽구먼요.  

 

  형님 쓰다보니 너무나도 쑥스러운이야기 뿐 삔트에 억으러진 뿌~얀 휠림과도같이.. 아~ 형님에게 말슴들여야할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무엇부터 말슴들여야 할까요.  정녕코 *몸파르낫스의 주민이여야하는 형님.  형님이 지닌 감성이며, 간직한 테크닠이며가 1953년의 피비린내나는 싸움터의 한국주민일수없는 형님에게, 무엇보담도 먼저 형님은 몸파르낫스의 주민이여야 한다고 불우짓고 싶소이다.  미친사람마냥 파리의 갸레리(갤러리)~란 갸레리~를 싸돌아 다니며 드려다 봤어요.  거기에는 Picasso도 있고 Matisse도 있고, Reault도 있고, Dali나 Arp나 Taugi, Eruest, Milo, Walhsie, Brague, Rorge, Goerg, leger 등은 물론 일음조차 들어 보지도 못한 작가들의 그림들이 100이 넘는 화랑들의 담이란 담에 가득 찾고, 어떤것은 일주일, 어떤것은 반달, 어떤것은 일개월만에 갈리는 눈부신 광경은 놀랠만해요.  그러나 가장 크게 느낀것은 젊은 이곳의 작가들이 무명이건 또는 약간 알려져 있드라도 그들은 그들 자체의 선과 면과 색과 구성으로서 어떻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볼려고들 모색하고있다 는점.  물론 Picasso나 Matisse를 존경하면서도 전혀 흉내 낼려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는다는것, 더욱이 Esprit에 관해서는 흥미조차 느끼질 안는다는것.  흉내로서는 도저히 진짜에 딸을수도 없고 더욱이 화랑에 Picasso나 Matisse가 잔뜩 걸려있으니 그 보물옆에 모조품(모방한것)을 걸 용력은 있을수도 없지요.  그럼으로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의색, 자기의 **마체~ㄹ로서 뚜렸한 개성을 표현함으로서 사람들이 납득할수있는 작품을 창조하려고들 지극히 긴장해들 보입니다.  자기자신의 뚜렸한 마체~ㄹ을 창조할수없는 화가는 화가일수없다고요.  과연 근대미술관에 걸려있는 대가들의 마체~ㄹ은 Picasso는 Picasso대로, Matisse는 Matisse대로 Brague, Dorin, Eruest, Ficahia, Wilo, Mondlieu, Reault, Soutine 할것 없이 그들의 마체~ㄹ의 창의라는 것은 놀랠만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그래도 인정받을수 있는 신인들의 작품이란, 마체~ㄹ이 강하고 개성적이라고 할수있어요.  문제는 자기자신을 어데까지나 과감히 내 세우는데 있는것 같습니다.  이러한 헤아릴수없는 작품들을 볼때마다 형님이 그리고 형님이 그림이 떠올라와요.  그리곤 이수많은 작품들과 형님의 작품이 뚜렸이 달으다는것을 확신하고싶어요.  지난 11월부터 금년2월까지의 4개월간에 본작품으로서는 형님의 작품만이 한국작품으로서는 달으다는것을 확언할수가있어요.  한국의 화가로서는 형님작품만이 개성적이라고요.  물론 대량적인 전람회로서는 Salon D'Antomne와 Salon D'Hiner 밖에 보지못하고 제가 여기오기직전에 있었든 Salon des tnillery (Trillery의 오기로 보임) 또 앞으로올 Salon de May는 아직 보지못해 모르겠습니다만, Salon D'Hiner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삼문(三文)작품들의 전람회였고, 또한 Venice에서 열렸든 Biennalle전에서는 강하고 무척 개성적인것들이면서도 너무나도 거츨다든가 그렀치 않으면 너무나 지나치게 자기를 주장하기에 붓이 딸으지못한것이 않이면 자기만족에 빠진 소위 대가들의 작품이었고, Salon D'Antomne에서는 씩씩한 작가들의 호흡은 감득할수있으나 그래도 이것이 참다운 앞날을 게시하는 작품이라고 뚜렸이 느껴질만 한것을 발견치못했서요.  오히려 이곳저곳에서 무시로 열리고있는 개전이 더욱 흥미있고 새로운것들이 전시되고있서요.  일본화가로서는 지난12월에 ***福澤一郞(후쿠자와 이치로) 가, 금년2월초에 ****岡本太郞(오카모트 타로)가 각개전을 열었었는데 복택일랑의 작품은 다소 대중에게서 영합하려고 함이 오히려 그를죽였고, 강본은 지나치게 원색으로서 무척다채로울려고 애썼으나 그의 설익은 마체~ㄹ은 별로 들여다보는 사람조차 적었든 모양입니다.  모다 때가 벗질못하고 어떻게 옴으라저 들어간것같아 쑥스럽두군요.  그것에 비해서는 형님작품이 몇배낫다고 할수있읍니다.  

 

 


* 몽파르나스 [Montparnasse] 파리의 지역. 18세기까지는 지대가 약간 높은 언덕이었기 때문에 ‘몽파르나스(파르나스 언덕)’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대로를 만들기 위해 언덕은 무너지고 이름만 남았다. 19세기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몽마르트르였다면 그 후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곳은 몽파르나스다. 이 지역이 가장 활기를 띤 것은 190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의 40년 동안이다. 카페에서는 예술에 관한 열띤 토론이 열렸고 많은 예술적 유행이 창조됐다. 지금의 몽파르나스에는 당시와 같은 열광은 없지만, 바벵 교차점에 있는 카페 4개(카페 르 돔, 라 로통드, 라 쿠폴, 르 셀렉트)에서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카페에서 모딜리아니와 샤갈 등이 예술 강의를 펼치고 음악가 사티, 미국인 작가 헤밍웨이 등이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현대미술의 선구자격인 피카소, 만 레이 등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알수없음. 

 

***후쿠자와 이치로(福澤一郞)

1930년대 초 일본에서 초현실주의를 확립한 공로를 인정받은 일본 모더니스트 화가였습니다. 

 

****오카모토 타로 (岡本太郞)

"예술은 폭발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일본의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화가 오카모토 타로.
1911년에 태어난 오카모토 타로는 18살이 되던 해에 일본에서 먼 동쪽에 있는 프랑스 파리로 넘어가 미술의 중심인 파리에서 유학한다. 공부하려고 파리로 모인 일본 예술가와의 만남과 피카소의 작품은 그의 삶에 큰 영감을 주었다. 프랑스 추상-창조 모임에 33살이란 최연소 나이에 들어가 연작을 선보인 바가 있으나 점차 순수 추상파에서 멀어지며 모임을 탈퇴한다. 이후에 전위적인 예술을 지향하며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교류하고 활동하며, 당시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근현대 미술의 선각자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본에 귀국해서 판화, 조각, 거대 조형물을 작업하며 오사카 만국박람회에서 "태양의 탑"이란 유명한 작품을 선보이며 일본의 근현대 미술사의 거장으로 이름을 올린다.

 


 

 

 

더욱이 작년에 다녀간 *우메하라 류 자부로(梅原龍三郞)의 그림은 전혀 문제도 되지않은모양이며 오히려 일본화단의 대가라는것이 쑥스러우리만치 비평이 좋칠못했든가 싶습니다.  그리고 Salon De May에 출품한 일본화가들의 작품이 모다 scalle(scale의 오기인듯)이 적고 비개성적이라고들 했었담니다.  일본화단이 큰 공부를 한셈이지요.  그렇다고해서 이곳의 화단이 모다 좋은 작가며 좋은 작품들이라는것은 않일것이며, 무엇보담도 중요한것은 1950년대의 Form과 색과 마체~ㄹ을 갖어야 한다는것이겠지요.  하여튼 요사이 파리의 화단은 더욱 새로워질려고 대가들의 압력에서 벗어나서 좀더 생생하고 활기찬 뚜렷한것을 그려볼려고들 무척 긴장해보입니다.  무엇이고 새로운 것의 낳는 진통기와도 같이. 그럼은요, Cezaune가 열어논 새로운길은 모~든각도에서 조명해놓아 화~ㄴ히 밝어진 오늘날 어데 수물떼가 맛당하야지요.  입체다, Fauve(야수파)다, 추상이다, 초현실이다, 파리의 모드와도 같이 늘상변한것 같으면서도 그리 변해지지도 않은 현대의 짧은 그림의 발자최가 뒤돌아 볼수도, 옆만볼수도, 그렇다고 껑충 앞으로 뛰어나갈수도 없는 한과도기적인 현상이 오날 파리화단의 모습인양 싶습니다.  이렇게 해봐도 어느 누구가 연길에 부닥치고 저렇게 해봐도 또한 누구와 맞쪼이고 그렇다고 뒷걸음질칠수는 물론 없고보니 더욱 누구보다도 새롭고, 아름답고 살찐작품은 창조 한다는것은 오죽이나 힘든일이랴 않하오리까.  조금씩 달으면서도 그렇다고 뚜렿이 이것이 새로길이며 그림이라고 내세울 작가와 작품이 맛당칠않은 그러한시절, 바람부는 시절일까요.  이러한 시기에 파리에서 다~만 몇개월이라도 생활하고나서 형님에게 말슴드릴수있는 가장중요한것은 형님은 형님만의 형님도않이고, 한국만의 형님도 않이고 오로지 세계에 형님의 작품을 내걸어뵘으로서뿐만이 참다운 형님일수있다는것.  또한 이것은 화가로서는 한국에서 형에게밖게 제가 말슴들일수도없는 일입니다.  이곳의 미술관에 진열된 서구나 동아의 수많은 걸작들을 삿삿히 들여다보아도 신라의 고불, 석굴암의 석불, 무열왕릉의 구결?, 봉덕사경의 부각, 법륭사의 백제관음, 또한 고구려의 벽화며, 낙랑의 채함, 그리고 고려의 청자, 이조의 자기들이 가지고있는 안윽하면서도 부드럽고 높은 경지는 좀처럼 있을수도 없거니와 딴곳의것과 뚜렸이 색달은 독자성을 늦길수있습니다.  어느것이 좋고 나쁘다는것이 아니라 이곳의 여러작품에 비해서 뚜렸한 독자성을 갖인 높은 곳의 걸작들이라고요.  지난날의 우리조상들이 간직하였든 예술적경지는 더할라위없이 고귀했었다고 늦겨지며 오늘날 또한 이줄기찬 전통을 새롭게 살릴수있는 한국예술가라면 세계예술계에 독자적인 뚜렸한 존재를 확립할수있으며 새로운길에 등불을 킬수도있으리라는것을 확신합니다.  형님의 여러 작품들이 눈앞에 설레입니다.  그것들은 나에게는 더하라위 없는 한국의 Form과 색과 새로워진 한국의 향토성을 북도다줍니다.  한국에있을때에는 그렇게도 뚜렸이 한국을 느껴보지못한 나에게 형님의 작품이 뚜렸이 이곳의 작품들이 가지고있는 향기와는 달은 한국의 안윽하고 부드럽고 여~ㄴ하면서도 뚜렸한 향기를 자아냅니다.  형님은 어떻게 하여서도 이곳에와야하고 이곳에서 작품을 내걸고 형님이지닌 색달은 경지를 과감히 내세움으로서 더욱 물으익어야할 앞날을 준비하여야합니다.  더군다나 형님에게는 이곳의 자극이 꼭 필요해요.  형님 그럿치 않습니까.  한국에서 어떠타는것이 문제가 않이라 뚜렷이 후일에 남길 좋은 작품을 만드다는것만이 형님이나 저가 살어나갈수있는 유일한 길이아닐까요.  지닌소질과 꾸준한노력과 참다운실력만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그이상의것은 요구치도 않어요. 오로지 실력만이 작품만이 자기자신을 표명할수있는 유일한 수단이지요.  Le Corbusier와 같이 생활한 5개월간에 무엇보다도 Naive하여야한다는것 Naive한 인간만이 새로운것을 만들어낼수 있었다는것을 깊이 느꼈어요.  그리고 절대로 쉴수없다는것앞에 무엇이있건간에 뚤코나가여야 한다는것 자기작품을 위해서는 조금도 양보가있을수없다는것. 꾸준히 '웨' 무엇이 본질에 파고드는 날카로운 탐구의 칼?을잠시라도 늦처서는 않된다는것.  속깊은 곳에서 울어나오는 본질적인 미의식이 꾸준히담음어짐으로서 새로운 아름다운 꽃을 피울수있다는것을 뚜렸이 늦겼서요.  그럼은요.  깊은곳에서 자연스럽게 울어나오야만 한다는것.  그럼으로 깊은곳에 꾸준히 양분을 저축하여야한다는것.  손재간 눈흘림 가면 이러한것들은 한국에서는 용납될수도 있을런지 몰으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용납될수없다는것. 그렀게 표명하지 않을수없는 뚜렸한 독자성을 깊이 갖이고있어야 한다는것.  형님 누구보다도 Naive하고 누구보다도 진실하고 새로워질려고 애쓰고있는 형님.  형님이 더욱진실하고 새로워지기위해서라도 이곳에 꼭 오셔야하겟오.  더욱이 한국의 예술계를위해서라도 형님은 꼭와야하겠서요.  저같은인간도 이곳 건축계에서 소중히역여주니 형님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지않어요.  앞으로 꾸준히 새로워질수있는 인간이면 존경을 받을수있어요.  문제는 남보다 새로운것을 어떻게 더욱 새롭게 표현하는가에 달려있지요.  하늘의 별을따기 보담도 Le Corbusier와 같이 새로운길을 더듬는다는 이 더욱 힘들다는 그의 아뜰리에에 들어와서 앞날 새로워질수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싶은 나의 오늘날은 누구보다도 행복스러우리라고 늦겨집니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발전하질 않는것같은 나의지성과 감성이 애달프며 가족과 같이 있지못함이 마음이 놓이질않고 앞으로 어느정도 자기완성을 할때까지 남고 싶고보니 더욱더 불안합니다.  형님, 형님이 오셨으면 나에게도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니 미칠것 같구먼요.  이곳에 오신 한국사람들과는 깊이 이야기가 통하질않고 딴나라 사람들과는 환경이 너무나도 달으고보니 쑥스럽고 해서 나혼자 묵묵히 제도판에 향하여 금을 긋는다는것만이 나의생활의 전부이라는 날들은 보내고있어요.  이렇게도 하고싶고 저렇게도 하고싶으면서도 깊이 흐느낄수있는 벗이없고 보니 쓸쓸할데가 다시 없읍니다.  좋은 그림을 보아도 좋은 음악을 들어도 항상 혼자서.... 그러니 너무나도 쓸쓸해요.  너머나도 아름답고 기름진것들이 많으니 더욱 쓸끌하군요.  형님, 븟한번 들지못한 생활이 계속된다는 소식을받고 어쩔수없이 막막하고 쓰라려져 쏟아져 나오는 눈물 어쩔줄을 몰랐어요.  누구보다도 가장 애껴야하는 형님이 창작에 바칠시간조차없이 생활에만 허덕이여야하는 한국이 원망스러워요.  좋은작품을 볼때마다 눈물이 핑~ 돌곤해요.  아~ 형님은 어떻게해서라도 이곳에 오셔야하겠어요.  형님의 예술이 성장키위해서는 이곳의 양분이 꼭 필요해요.  그리고 오실때에는 뒤이여 사모님을 불르실수잇도록 해놓아야할질 않켔어요.  무었보담도 마음이 안정되여야해요.  저도 어떻게 해서라도 제처를 불르도록 할 작정입니다.  어떻게 죽을 힘을내서 애쓰면 안될일은 없겠지요.  학교에서는 돌아오래는 **최촉장이오고 더욱이 Le Corbusier에게 돌려보내도록 해달라고요.  여권은 끈허진채 한국의 가족들의 생활걱정이며 여권문제며가 불안정한 생활을 강요했섰서요.  형님이 애써주신 덕분으로 지난2월말에야 겨우 여권이 해결되어 정식으로 남게되고 파리족에 등록을 필했어요.  인제는 가족을 불러 안정된마음으로 자기완성에의길(앞날의 한국을위한 제가할수있는 가장 속한길이겠죠)을 달려야 할터인데 무었보담도 앞서는것은 돈이두구먼요.  돈이란 더럽고쑥쓰러운것이면서도 돈이란 가장 필요한것이 두구먼요.  돈이 있서야 하고싶은것을 할수있다는 돈없시는 엇절수없다는 자기자신의 발전을 위하여서는 먼저 앞서는것은 돈이라는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돈이있어야좋은것을 볼수있고 좋은것을 살수있지 않켔어요.  아름다운것들을 형님에게 보내드리고 싶으면서도 그럿치못하옴이 쓰라립니다.  이곳의 물가도***불인(佛印)싸움으로 나날이 올으고 있어요.  참 한국에서 화폐개혁을 했때지요.  백분지일로 낮첬다는데 얻더케 서민들의 생활이 좀 나아지게됬는지요.  국제시장은 다~타버렸때지요.  삼일절에 이박사가 이이상더 참을수없다고 성명했다지요.  어제 스탈린이 죽어엇서요.  누가 대신 나서게되는지요.  좀달러지려는지요.  어떻게 살아나갈수있는 세상이 와야하지 않겠어요.  한국싸움이 끄처야할터인데 '금강'이 그립습니다.  형님과 마주앉어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든날들이, 이곳(Le Done)에서 이야기를 나누어야할터인데 아~ 형님에게 말슴드러야 할것이 너무나도 많고보니 무엇을 어떻게 말슴들여야할른지, 모다들평안하시겠지요.  조병화형 이헌구선생 김광섭선생 황순원선생 오영진씨 윤효중씨 김말봉여사 김중기씨 김훈군 이대경씨  권옥연씨  김동리씨 그리고 김용래군 박학재선생  모든 사람들께 신세만지면서도 사람된도리도 못하고있음이 정적합니다.  형님에게까지 이렇게 소식전하옴이 늦었아오니 무어라 말슴드릴수조차 없어요.  넓고 인자하옵신 형님에게 모든것을 용서해 주시오리라 믿사오며,  딴분들이 저에게 꾸지람을 하옵시다면 모든것은 저의죄많은 탓이오니 달게 받겠어요.  앞으로 시간나는대로 적어 이곳의소식을 전하겠읍니다.  그리고 형님이 하로바삐 오시기만 고대하옵겠읍니다.  시계는 방금 오전세시를 금긋습니다.  낯 익은 바닷가의 마을은 환~한 낮이겠지요.  누가 나를 그리워하고 누가 나를 꾸짖겠지요.  형님이 '금강'에 나오셔서 서러움을 마시고 게시오리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오셔야 하겠서요.  마음을 든든히 가지고 작품을 들고 꼭오셔야하겠어요.  미칠듯이 형님 오시기만 기다리옵니다.  딴분들에게도 잘 말슴해 주십시오.  사모님 말슴과 같이 잡념을 버리고 공부에만 전념하겠습니다.  너무나도 죄많은 동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딴분들에게는 좋은작품을 만드러 뵈들임으로서 오해를 풀 도리밖에 없을상싶습니다.  부디 몸 조심하옵시기 비옵니다.  7-3-1953 파리에서 중업 배 (이글은 저자가 작년가을 베니스국제예술대회에 참석하였다가 귀로 파리에 들려서 김환기화백에게 보내온것이다)

 

 

 


 

*우메하라 류 자부로 (梅原龍三郞)

일본의 서양화가.  유럽에서 배운 유화에  일본의 전통 미술을 자유 분방하게 도입 현란한 색채와 호방한 터치가 만들어내는 장식적인 세계를 전개. 일본 양화계의 중진으로 군림했다.

 

**무엇을 재촉하는 뜻을 적은 글이나 편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또는 베트남 독립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와 비엣민(월맹)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베트남 전쟁(the Franco-Vietminh War) 등으로 불린다.